다음날 아침 나는 참의원으로 갔다. 소구의 똥똥한 몸집인 위원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상냥한 매너였다. 자기소개를 먼저 하는 것이 좋겠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기는 동경(東京)의 모 대학 야간 전문부 출신인데 고학으로 고등고시에 합격한 후 경찰에 투신하여 경찰 총수인 경시총[警視總監]에 올랐다 한다. 당시 동경(東京)시장은 3선인 미노베[美濃部量吉]씨였는데 여당인 자민당에서는 다음 선거에서는 미노베[美濃部] 시장을 낙선시키기로 했다는 것이다. 미노베[美濃部] 시장과 맞설 인사를 물색하다보니 경시총감이던 자기에게 낙점되었다고 한다. 결과는 패배였다. 그래도 여당에서는 돕는다는 입장에서 비례대표의 한 사람으로 자기를 선출해 주었고 외무위원장으로 앉힌 것이라고 설명한다.
입지전적인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일본사람들은 반성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면서 하다노[秦野]위원장은 이야기를 계속한다. 일본이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을 통해서 돈을 벌고 부자가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오늘날에는 이 일을 이야기하려는 사람조차 없게 되었다며 분개조로 말한다.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안중근(安重根) 의사라는 데 대하여 나는 적지 않게 놀랐다. 어떻게 안중근(安重根)의사를 존경하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는 안(安의사를 여순(旅順 )감옥에서 모시던 간수(看手)의 자손으로부터 감화를 받았다고 설명한다.
그는 자기 몸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며 하다노[秦野]라는 이름이 한국인의 진(秦)씨와 연류되었다고 풀이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일본 천황의 혈통에도 분명히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날 저녁 나는 또 다시 스노베[須之部] 차관과 저녁을 함께 했다. 한일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질 경우에 하다노[秦野]씨가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도움을 줄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를 일부러 소개한 것이라고 한다. 하다노[秦野]의원과의 대담에서 연구소문제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지만 나로서는 특별한 사람을 만났던 셈이다.
그 무렵 우리나라에서는 일본 연구의 필요성이 강도 높게 주장되기도 하였다. 언론에서도 여러 가지 지적과 보도가 있었다. 82년 9월 7일 동아일보(東亞日報)는 ‘일본연구(日本硏究)의 필요’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은 사설을 실어 서울대학교에 일본 연구소가 설립된다는 보도에 부쳐 보다 체계있고 장기적인 계획아래 지속적인 일본연구가 뿌리를 내리기를 바란다고 강조하였다.
그 후 하다노[秦野]씨는 우리나라에 온 일이 있었는데 김포(金浦) 비행장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안중근(安重根) 의사 동상이었다는 소식이 도하의 신문을 장식하였다. 후에 그는 일본의 법무대신이 되었다.
나의 총장재임 중 일본연구소나 한국연구소 설치는 실현되지 못했다. 일본으로부터 100만 불을 받고 일본연구소를 만들려 한다는 전연 근거 없는 신문기사 때문에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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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총장 시절 동아일보와의 인터뷰 (1981.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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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베[須之部] 차관은 관직을 물러난 후 동경(東京)의 행림대학(杏林大學) 교수가 되어 활약하는 한편 일본 왕세자의 가정교사격인 동궁참여(東宮參與)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가 황태자가 천황으로 즉위한 후에는 궁내청참여(宮內廳參與)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는 동경(東京) 방문 시에 그와 하야시[林建太郞] 전 동경대(東京大) 총장, 마에다[前田利一] 전 주한대사[駐韓大使] 등과 가끔 자리를 같이 하였다.
나는 하다노[秦野]의원과 만난 후 안중근(安重根) 의사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흠모의 정을 굳히게 되었다. 안(安)의사와 일본사람이 관련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기도 하였다.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여순(旅順) 감옥에 계실 때 안(安)의사에게 감화되어 최후까지 도움을 준 사람이 헌병간수 치바 토시치[千葉十七]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헌병 상등병으로 여순(旅順) 감옥 간수장이던 지바(千葉)씨는 6개월 동안 수감되어 있다가 1910년 3월 26일 처형당한 안(安)의사를 간수와 죄수의 신분으로 만났다.
29세였던 지바[千葉]씨는 안(安)의사가 공판정을 오갈 때 마다 경호를 맡으면서 안(安)의사의 사상과 인격에 감복하였다. 지바[千葉]씨는 안(安)의사가 민족의 독립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몸을 바친 고매하고 의로운 인격자였으며 평화를 기원하는 평화 애호가였던 데에 크게 감복하고 안(安)의사를 스승으로 모셨던 것이다. 안(安)의사 또한 당시 일본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지바[千葉]간수의 인간적인 보살핌에 답하는 뜻으로 처형 하루 전날 ‘위국헌신(爲國獻身) 군인본분(軍人本分)(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유묵(遺墨)과 수인(手印)을 남겨주시기도 하였다.
안(安)의사가 처형된 직후 지바[千葉]씨는 자진 제대하여 고향인 센다이[仙台]시에 돌아와 철도원으로 있으면서 주위의 눈을 피해 안(安)의사의 사진과 필적을 불단(佛壇)에 모시고 하루도 빠짐없이 추모하다 34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안(安)의사에 대한 추모의 정은 지바[千葉]씨가 죽은 뒤 그의 부인에 의해 계속 이어졌고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자 지바[千葉]씨의 양녀인 조카 미우라[三浦]여사에 의해 이어져 오고 있는데 이분도 70세가 넘은 고령이다.
지바[千葉]씨의 감화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의 하나가 조카인 가노 다쿠미[鹿野琢見]씨이다. 가노[鹿野]씨는 어린 시절 당숙이 일본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죽인 안(安)의사를 칭송하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차츰 그를 이해하고 자신도 안(安)의사를 흠모하게 되었다 한다. 2차 대전 후 그는 변호사가 되어 동경(東京)변호사회 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당숙인 지바[千葉]씨가 묻혀있는 센다이[仙台]시 대림사[大林寺]에 안(安)의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76년에는 유묵비를 세웠으며 79년에는 안(安)의사 탄생 1백 주년을 맞아 유물을 안(安)의사 승모회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는 83년 ‘안중근 의사 연구회’를 주도적으로 창설하여 부회장직을 맡아오면서 회원인 학계 ․ 언론계 ․ 문화예술계 인사 백여 명과 함께 일본 내에서 안(安)의사 재평가(再評價) 작업을 벌여왔다.
그는 일본 내에서 숱한 오해와 비난을 받아오면서도 각종 강연 등 열정적인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근래에는 일본의 안(安)의사 처벌이 위법이라는 ‘안중근 무죄론’을 발표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 91년 3월 26일 안중근(安重根)의사 순국 81돌을 맞아 내한하여 강조한 그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음미해볼 만하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이웃 나라에 대한 태도에 잘못이 있었으며 일본의 잘못을 응징한 안(安)의사를 정당하게 평가한다면 일본은 보다 크고 훌륭한 나라가 될 수 있다.”
가노[鹿野]씨나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 하다노[秦野]씨와 같은 일본인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쯤이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 사실이 나에게는 야릇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왜냐하면 안(安)의사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숭모(崇慕(의 정(情)이 어느 정도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되는 까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