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시절에는 인간생식(人間生殖)에 관한 연구 관계로 Geneva에 소재한 WHO를 방문할 기회가 많았다. 서울대학의 인구의학연구소(Institute of Reproductive Medicine and Population)가 WHO 협력연구소(Collaborating Center)로 지정되어 있었고, 나는 소장직을 겸직하고 있었던 까닭에 회의에 자주 참석하였던 것이다.
78년 7월에도 연구소장 회의가 있어서 Geneva에 갔다. 여러 차례 회의에 참석했지만 관광과는 인연이 멀었다. 스위스도 빈번하게 방문한 셈인데 Geneva 이외에는 가본 곳이 없었다. 관광이라고는 ‘몽블랑’을 한 번 오른 것뿐이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귀국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번에는 회의 후 Bern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었다. 나와 함께 예방의학 교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신영수(申英秀) 박사의 빙장되시는 천병규(千炳圭) 선생이 주(駐) 스위스 대사로 계셨던 관계로 Bern을 방문하고 인사를 올리기로 했었다. Geneva에서 기차로 Bern에 갔다. 천(千)대사 내외분의 환대가 대단했다. 대사관저에서 짐을 풀었다.
도착하던 날 저녁에 천(千)대사께서는 여러 가지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마침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던 맏 따님이 방문 중이어서 더욱 흥겨웠다. 신(申)박사를 생각하시는 내외분의 마음씨가 이야기 군데군데에 스며있었다. 그 다음날의 계획에 대하여도 이야기가 있었다. 골프도 좋고, 관광도 좋고, 무엇이건 원하는 것이 있으면 도와주겠다는 말씀이다. 나는 말로만 듣던 융 프라우(Jung Frau)를 보고 싶다고 하였다. 일제시 학생시절에도 Jung Frau는 우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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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HO서태평양지역 나카시마 사무처장의 인구의학연구소 방문 (1980.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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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千)대사의 경력은 대단히 호화롭고 다양했다. 신영수(申英秀) 교수를 통하여 더욱 두터운 교분이 생겼지만 자당 어른이 안동 권(安東 權)씨여서 왠지 친밀감을 느꼈다. 일본 오사카상대(大阪商大)를 졸업한 후 42년에 조선은행(朝鮮銀行)에 입행(入行)하셨다. 해방 후에는 재무차관을 거쳐 한은(韓銀)으로 복귀하였다가 61년에는 재무장관이 되셨다. 그 후 66년에는 ADB(아시아 개발은행, Asia Development Bank) 상임이사로 되셨고, 74년에는 주(駐) 태국 ․ 라오스 대사, 76년에는 주(駐) 스위스 대사로 취임하고 외교관으로 활약하시는 중이었다.
나는 천(千) 대사로부터 값지고 귀한 말씀을 들었다. 그때까지 걸어오시던 중의 일화, 외교관 생활 중의 에피소드 등 평소에 듣지 못하였던 여러 가지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다음날, Jung Frau 여행은 참으로 멋진 것이었다. Jung Frau는 Bern주 남동부 베르너 알프스 산군에 속하는 4,158m 높이의 산이다. Jung Frau 즉 ‘처녀’라는 이름은 산 아래에 있는 도시인 ‘인털라켄’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명명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철도역인 ‘융프라우 요흐’는 3,454m 높이에 있는데, 정상까지는 오르지 못한다 해도 여기서 내려다보는 장관은 말이나 글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나는 웅장하고도 교묘한 대자연에 대하여 감복했지만, 이미 100년 가까운 옛적에 철도를 부설한 스위스사람들에게 저절로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융프라우 철도는 1896~1912년에 완공되었다 한다. 최대 경사도가 25%이며, 9.3㎞를 오르는데 50분이 걸린다. 나는 이 기차를 타고 한없이 환상에 젖기도 하였다. 기점역(基點驛)인 ‘클라이네 샤이텍’은 2,061m 높이에 위치하는데 여기에서 약 2㎞는 완만한 초원이나 나머지 7㎞는 산허리를 뚫은 터널이다. 인간의 능력과 힘이 이렇게까지 크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 몰랐다.
밤 9시 가까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천(千)대사는 약주를 나누자고 하신다. 해박한 지식과 유머는 천(千)대사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미국 친구 한 사람이 올 터이니 같이 마시자고 하신다. 이윽고 천(千)대사 또래로 보이는 미국 사람이 왔다. 미 육군대령 출신이며 사업관계로 서울에도 자주 왔었고 천(千)대사와는 오래 전부터의 친구라고 자기소개를 한다. 천(千)대사의 영어실력은 정평이 있었지만 직접 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훌륭한 영어실력이다. 특별히 공부한 것은 아닌데, 그래도 영어 때문에 고생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고 겸손해 하신다.
자정(子正)이 가까이 되어 미국 부인 두 분이 나타났다.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것 같다. 그렇다 해도 이 밤중에 어찌된 일인가 하고 나로서는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았다. 이윽고 자정이 되었다. 촛대에 불이 당겨졌다. 건배하자고 천(千)대사가 제청하신다. 건배를 마쳤다. 이것으로 의식(儀式)은 끝났다고 선언한다. 이혼(離婚)파티인 것이다. 미국부인 두 분 중 한 분은 미국 남자분의 부인이고 다른 한 분은 부인의 친구라고 한다. 건배가 끝나고 간단한 인사를 교환하더니 친구라는 부인이 이혼녀(離婚女)를 데리고 나간다.
참으로 희한한 의식에 참석했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천(千)대사는 일부러 이혼파티라는 사실을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내 일생에서 아직까지는 최초이자 최후인 파티였다.
88년 7월에 천(千)선생은 고희(古稀)를 맞이하셨다.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축하연에는 나도 참석했다. 새삼 선생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옛 생각으로 한때를 보냈다. 많은 축하객들이 ‘만년 청춘(靑春)’, ‘참으로 멋진 분’, ‘친화력(親和力) 뛰어난 국제인’, ‘위트와 유머를 지닌 분’ 등의 표현으로 천(千)선생을 그리고 있었다. 천(千)선생은 93년 7월 19일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화려하고 값진 일생(一生)을 마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