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아웅산 사건이 발발한 후, 진의종(陳懿鐘) 내각이 출범했고 나는 문교부장관으로 입각했다. 진(陳)총리가 나에게는 중학교 2년 선배이지만 4학년을 마치고 구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하셨기 때문에 대학에서는 3년 선배가 되었다. 당시 사수(四修)라는 학생은 수재 중의 수재라고 일컬어졌다. 진(陳)총리가 이런 부류의 학생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중학생 시절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하여는 오래 전부터 존경하여 왔다.
진(陳)총리는 43년에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였고 같은 해에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였다. 일제시대의 고문시험합격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특히 한국인에게는 이 시험에 합격하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해방 후 진(陳)총리는 상공부에 몸을 담게 되어 48년에 전정(電政)과장, 52년에 광무국장이 되셨다. 그 후 주택영단 이사, 호남비료 전무 등을 거쳐 60년에는 상공부 차관으로 발탁되어 상공행정을 차분하게 이끌어 갔다. 관계를 떠난 후 대한교육보험 부사장, 울산비료 전무이사, 한전 부사장 등을 역임하셨고, 71년에는 고향인 전북 고창(高敞)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셨고, 73년에는 고창(高敞)ㆍ부안(扶安)에서 출마하여 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셨다.
야당의원의 입장에서 의정활동을 하였는데 그의 행정 경륜과 해박한 지식은 경제통으로서의 존재를 십이분 과시토록 하였다. 81년에는 여당인 민정당후보로 정읍(井邑)ㆍ고창(高敞)에서 출마하여 11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85년에는 12대 국회의원(전국구)이 되었다.
79년에 보사부장관으로 취임하였는데 내가 친교를 맺게 된 것은 그때부터이다. 친교라고 해도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며 나의 전공분야가 보건학인 관계로 가끔 자문에 응하는 정도였다. 조용하면서도 예리하게 꿰뚫는 통찰력에 감명을 받기도 하였다. 진(陳 )총리에게는 보건사회 분야가 생소했겠지만 짧은 기간 내에 문제점을 파악하는데 비상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당 내에서 그는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82년에 민정당 정책위 의장, 83년에 대표의원으로 활약하다가 그해 10월에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총리 재임 중에도 진(陳)총리는 나를 무던히 아껴주었다.
업무보고 차 총리실을 방문하면 마치 가족을 대하듯 따뜻하게 맞이해주었다. 간혹 식사 때에도 초청해 주었다. 진(陳)총리는 상당한 애주가였다. 얼큰하게 취기가 돌면 평소의 점잖음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농담도 잘하였고, 창(唱)을 읊기도 하여 좌중을 흥겹게 하였다. 지방출장 때에도 간혹 수행하였는데 차분하고 치밀한 그의 성품은 어디에서나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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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줄 왼쪽에서 5번째가 필자, 7번째가 진의종 국무총리이다 (사진의 설명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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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85년 2월의 총선을 수개월 앞두고 뇌혈관경색증(腦血管硬塞症)이 생긴 것이다. 거동도 힘들게 되었지만 언어장애가 대단하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진(陳)내각은 선거내각의 성격을 띠게 되었지만 총리가 와병상태였으니 문제가 심각했다. 그러나 전두환(全斗煥)대통령은 선거가 끝날 때까지 총리를 바꾸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총선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진(陳)내각은 바뀌었고 나도 문교부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진(陳)총리는 눈물겨운 투병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연초에는 반드시 방문하여 문안을 드리는데 병세가 점차 호전되는 양상을 보게 될 때마다 나의 일같이 기쁘게 느껴진다. 한참 만에 93년 2월 25일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취임식에서 만나 뵈었다. 건강하게 보였으며 불그스레한 홍안은 예전과 같았다.
진(陳)총리와 가장 가까운 분의 하나가 나와 대학 동기인 박찬무(朴贊武) 박사다. 진(陳)총리와 박(朴)박사는 동향인 관계로 예부터 절친한 사이이며 물론 현재도 그러하다. 박(朴)박사와 만날 때 마다 진(陳)총리 이야기가 나오는데 만일 그가 건강하였더라면 우리 주변의 판도가 상당히 변했을 것이라고 맞장구를 치곤 한다.
진(陳)총리의 영부인이신 이학(李鶴)여사도 대단한 분이다. 자수(刺繡)의 대가이시며 전시회도 몇 번인가 가지셨다. 여사의 자수활동은 중단됨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진(陳)총리의 예술성이 이(李)여사로부터 받은 영향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나는 직접 참석할 기회가 없었지만 진(陳)총리 내외분이 중심이 되는 가족놀이가 대단히 예술적이라는 말을 전해 듣고 있다.
여야(與野)를 두루 거친 정치가이시고 한 나라의 재상을 지내신 진(陳)선배께서 많은 업적을 쌓아 올리신데 대하여 경의를 표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런데 이 거인(巨人)도 건강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골프를 함께 치면서 건강을 자랑하던 때가 엊그제 같건만 이미 옛일이 되고 말았다. 진(陳)총리가 마련한 각료친선 골프모임에서 뜻하지 않게 나에게 돌아온 우승컵을 볼 때마다 이것저것 명상에 젖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