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古稀)는 70세를 말한 것이며 희수(稀壽)라고도 한다. 우리 주변에서는 만 70세가 아니라 우리 나이로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옛적에는 수명이 짧았던 관계로 환갑을 대단하게 여겼는데 근래에는 그렇지가 않고 고희를 축하하는 풍조가 강하다. 그러나 고희도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77세 즉 희수(喜壽), 88세 즉 미수(米壽), 99세 즉 백수(白壽) 등이 각광을 받는다.
고희라는 단어가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에 나오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 유래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문득 다음과 같은 곡강시(曲江詩)를 다시 한 번 음미해보고 싶은 심정이 생겼다.
朝回日日典春衣(조회일일전춘의) 每日江頭盡醉歸(매일강두진취귀)
조회에서 돌아오면 날마다 봄옷을 저당 잡혀 매일같이 곡강에 나가 잔뜩 취해 돌아온다.
酒債尋常行處有(주채심상행처유)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
몇 푼 안 되는 술빚은 가는 곳마다 깔려 있지만 인생 칠십 살기는 예부터 드물도다.
穿花蛺蝶深深見(천화협접심심견) 點水蜻蜓款款飛(점수청정관관비)
꽃 사이를 맴도는 호랑나비는 보이다 말다 하고 강물 위를 스치는 물잠자리는 유유히 나는구나.
傳語風光共流轉(전어풍광공류전) 暫時相賞莫相違(잠시상상막상위)
봄 경치여! 우리 모두 어울려 잠시나마 서로 등지지 말고 봄의 기쁨 나눠보세.
나는 생일을 음력으로 지낸다. 음력으로 5월 13일이다. 호적에는 7월 13일로 되어 있다. 23년생이니까 92년은 우리 나이로 70세, 즉 고희가 되는 해이다. 금년은 음력의 5월 13일이 양력으로 6월 13일이다. 환경처로 가기 전까지는, 금년 6월 13일을 기해서 『최신보건학(最新保健學)』개정판과 회고록을 출간할 예정이었는데, 작년 4월에 입각하면서 이 계획을 백지로 돌렸다. 현직에 있는데다가 92년 이 날은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열리는 UN환경개발회의에 참석하게 되어 있는 까닭에 아예 고희연(古稀宴)을 안하기로 하였다.
미국 San Francisco에서 개업하고 있는 아들 윤택(允澤)에게도 그 뜻을 알리고 귀국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런데 서울에서 살고 있는 세 딸 내외들이 몹시 섭섭해 하며 자식의 입장에서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Rio회의에 다녀 온 후에 천천히 하자고 했더니, 고희연을 앞당기는 것은 괜찮지만 연기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6월 8일 출국하게 되어 있던 관계로 적당한 날을 잡기가 힘들었다. 6월 5일은 제20회 세계 환경의 날이고 우리나라에서는 국가환경선언(國家環境宣言)을 대통령께서 선포하시는 기념식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게 되어있어서 이 날은 피하는 것이 좋겠고, 다음날 6월 6일은 현충일(顯忠日)이어서 모든 국민들이 떠들썩하는 것을 자제하고 있다. 그리하여 출국 전날, 즉 6월 7일 저녁에 가족들과 저녁을 함께 들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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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사람 고희잔치 사진이다 / 가운데 우리 내외 오른쪽으로는 서세옥 화백이다 (1999. 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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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로부터 연락을 받기도 하였다. 궁여지책으로 얻은 결론이 서울의대 동기생 내외들과 환경처에서 밤낮으로 수고하고 있는 간부직원 내외분들을 초청하기로 하였다. 프라자호텔 덕수홀에서 중국음식을 들도록 하였다. 아무리 조촐한 모임이기는 했지만 예의를 갖춘다는 의미에서 이현재(李賢宰) 전 총리 내외분을 모시고 축사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나의 고희연은 일단락 지었다. 리오데자네이로에서는 생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6월 13일 점심때 동행하던 권숙표(權肅杓) 연세대 명예교수, 노융희(盧隆熙) 서울대교수, 노재식(盧在植) 환경연구협의회장, 이승무(李承務) 연세대교수, 차철환(車喆煥) 고려대교수 등 5명의 자문관과 환경처 출입기자 중 공식파견으로 되어 있던 내외경제의 이동훈(李東勳) 차장, 국민일보의 구희천(具熙千) 기자와 언론사 자체에서 파견한 KBS 민병철(閔丙鐵) 차장, 조선일보의 최보식(崔普植) 기자를 중국식당 ‘신시나’에 초대했다. 민(閔)차장은 위성송고(衛星送稿)관계로 불참했다. 뜻밖에도 기자들은 고희를 축하한다며 꽃다발을 들고 왔고, 최(崔)기자는 기념품까지 갖고 왔다. 다섯 분 교수와 나는 깜짝 놀랐다. 사실 나는 그날이 나의 생일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이분들을 초대했는데 정말 뜻밖이었다. 교수들 역시 생일은 물론이고 내가 고희를 맞은 것조차 몰랐다.
그날 저녁에 정원식(鄭元植) 국무총리의 초청연(招請宴)이 있었다. 주 브라질대사 내외분, 대표단원, 총리수행기자들이 Paris Maxim이란 양식당에 초대되었다. 초대연이 끝날 무렵에 커다란 케이크가 들어오고 7개의 촛불에 불이 붙었다.
오늘이 나의 고희(古稀)라면서 정(鄭)총리가 인사를 하였다. 나는 어쩔 줄 몰랐다. 돌발적인 일이라서 적이 당황하기도 하였다. 어찌되었든 세계의 미항(美港)인 리오데자네이로에서 고희 축하를 받게 되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했다. 의도적으로 마련한다 해도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리오의 야경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코르크바도 언덕(Morro do Corcovado)의 크리스트상은 일품이다. 해발 710m의 절벽 꼭대기에 서 있는 크리스트상은 리오의 심벌로서 유명하다. 1983년에 건조된 이 상은 높이가 30m이고 일자(一字)모양으로 양팔을 벌리고 있는데 그 길이가 28m이다. 해안지구에서 올려다보면 낮에는 하얀 십자가 같고 밤에는 조명을 받아 신비하게 보인다.
리오에는 관광명소(觀光名所)가 수없이 많다. 리오의 해변은 참으로 아름답다. 크고 작은 곳을 합치면 10여 군데에 이르고 있는데 이들이 거의 연속되어 있는 것이다. Flamengo, Botafogo, Copacabana, Leme, Leflon 등 해변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관광객을 즐겁게 해준다.
팡 데 아수카르(Pao de Acucar)에서 내려다보는 리오의 절경은 잊을 수 없다. 해변에 럭비공 같은 모양의 바위가 돌출되어 있어 얼핏 보기에는 바다위에 있는 기암(奇巖)같다. ‘팡 데 아수카르’라는 이름은 인디오의 포운도 아수카(까끌까끌한 작은 섬)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듣고 있다.
돌출부의 정상이 해발 390m로 코르크바도에 비해 낮은 위치에 있지만 바다로 뻗어 있기 때문에 정상에서는 마치 바다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풍경이다. 정상까지 곤돌라가 운행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리오같이 아름다운 도시는 없었다. 3대 미항(美港)에 들어있는 시드니와 나폴리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더욱이 세계 각국의 건축전문가들이 모여들어서 설계하고 지었다는 건물들은 놀랍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지만 빈부(貧富)의 차가 지나치다는 느낌은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 남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인구 십만의 달동네가 있는가 하면 호수나 하천수는 썩어 있었다. 아름다운 대자연과 그 생태계를 보전할 수 있도록 전력투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현안과제(懸案課題)임에 틀림없다.
이 아름다운 리오에서 고희(古稀)를 맞이한 것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생각해 보지도 못했지만 정상적으로는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다.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만 한 가지 덧붙여 설명한다.
학술원 회장이 된 후 93년 1월부터 상조회(相助會)를 운영하도록 하였다. 총회에서는 세부규정을 회장단과 분과회 회장으로 구성되는 임원회에 위임하였다. 임원회에서 논의한 결과 경사에 있어서는 희수(喜壽), 미수(米壽), 백수(白壽)를 맞이하는 회원들을 축하대상으로 정하고 전 회원에게 규정을 통지하였다. 한편으로는 학술원에 구비되어 있는 회원신상카드의 기록에 따라서 희수, 미수 등에 해당되는 회원을 파악하기 위한 조사도 하였다.
임원회는 매월 한차례 열리는 것이 관례인데 1월 임원회에서는 문제제기가 없었는데, 2월 임원회에서는 희수(喜壽), 미수(米壽) 등이 우리 고유의 것이 아니라 일본식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 이의를 계기로 하여 문헌조사도 하고 관련기관에 문의도 하였다. 우리 고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리하여 3월 임원회에서는 이들 대신 8순, 9순, 백수(百壽)를 축하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규정을 바꾸어 다시 회원들에게 알렸다. 회장으로서의 입장이 난감했음은 당연한 일이며, 전 회원 특히 희수와 미수에 해당되는 회원들에게는 각별히 사과를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