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총장 재임 시인 1982년 어느 날 당시 국회외교위원장이던 박동진(朴東鎭) 의원이 초청하는 오찬 모임에 참석한 일이 있다. 전 UN 사무총장(事務總長) 발트하임(Kurt Waldheim) 박사 내외를 환영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장충동에 위치한 서울클럽에서 있었는데 초청자 내외를 비롯하여 유창순(劉彰順) 전 총리내외, 김상만(金相万) 동아일보 명예회장 내외, 본인 내외 등이 자리를 같이하였다. 외무부에서도 담당과장이 안내인으로 배석하고 있었다.
모임에 참석하고 나서 내가 초청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당시 발트하임 박사가 미국의 Georgetown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어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도 초청장이 온 것이다.
강의방법이나 강의내용이 화제(話題)의 중심으로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대체로 2, 30분 강의를 하고 질의응답을 한다고 설명한다. UN 사무총장직을 10년 동안 지낸 사람이 자신뿐이고 생존해 있는 사람도 자기뿐인 까닭에 별로 강의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고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한다. 부인도 법률가인데 비엔나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던 때에 겪었던 어려운 일들을 간간이 소개하기도 하였다. 조지타운대학에서는 키신저 전 국무장관, 헤이그 전 국무장관, 브레젠스키 전 안보특별보좌관 등과 함께 일한다고 한다.
유익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옆에 자리하고 있던 외무부 안내원에게 방한 목적을 물어봤더니 청년상공회의소(靑年商工會議所)에서 특강(特講)을 하기 위해 내한한 것이라고 한다. 자연히 강사료(講師料) 문제가 나왔다. 한 시간에 5만 불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다른 인사들에게 들리지 않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해준다. 그것도 왕복 여비나 숙박비는 별도라는 설명이다.
상기한 인물들에게는 각각 강사료가 정해져 있으며, 그 중 키신저 씨가 제일 많이 받는다고 한다. 어쨌든 나는 상당히 놀랍게 생각했다. 안내원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하며 5만 불이 5백만 불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부언한다. 다시 말해서 국제적(國際的)으로 우리나라를 잘 소개해 준다면 5만 불이 문제가 아니라고 풀이해준다. 그는 나의 시야가 의외로 좁다고 은근히 꼬집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대학의 강사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질의 것이기는 하지만 대학생활을 하고 있던 나의 상식으로는 판단하기 힘든 액수이다. 사실상 우리나라 대학의 강사료는 지나치게 싸다. 그래서 훌륭한 강사를 모시는 데는 양심상 가책을 받는다. 전에 비하면 강사료가 다소 올랐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사정은 매한가지다.
서울대학교 총장 재직 시에 어려웠던 것의 하나가 강사료였다. 매년 태부족이다. 그래도 이리저리 정산(精算)할 수 있는 길이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가장 강사료가 많이 드는 대학은 음악대학(音樂大學)이다. 음악 실기실습은 1:1을 원칙으로 하는 까닭에 강사료가 많이 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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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총장 시절 / 주한 미국대사 리처드 워커 박사에게 명예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 하였다. / 왼쪽부터 이규호 문교장관 내외, 워커대사 내외, 우리 내외 (1982. 4.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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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와서는 부족한 강사료를 메우는 길이 점점 어려워졌다고 듣고 있다. 그 만큼 총장의 고민이 커진 것이다. 하루빨리 이러한 고민을 총장이 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원래 우리나라의 대학에서는 교수의 수가 엄청나게 적다. 모두가 예산 때문이다. 사립대학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정규 교수(正規 敎授)보다 시간강사(時間講師)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교수의 수가 많다고 해도 시간강사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충분한 교수를 채용할 수 있는 예산이 마련되고 필요한 때에 시간강사를 사용할 수 있는 재원이 있다면 이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러나 요원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편 대학에서 말하는 강사료(講師料)와 앞서 적은 경우와 같은 강연료(講演料)는 그 성질이 다르다. 그렇기는 하지만 강연료에 비해 강사료가 지나치게 적다는 현실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발트하임 씨는 후에 오스트리아 대통령이 되었는데 1992년 7월 8일, 6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날 때까지 나치전력(前歷)시비에 휘말려 괴로운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텔레비전과 가진 고별회견에서 “이제야 좀 살 것 같다”며 “지금 내 나이 73세인데 앞으로 몇 년 간은 평화롭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숨을 내 쉬었다고 한다.
발트하임 씨는 2차 대전 중 히틀러의 나치군대 장교로 일했던 군경력(軍經歷)을 떳떳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비난에 대하여 그 사정을 해명하느라고 무던히 애를 썼다.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속국이나 다름이 없었던 상황 밑에서 나치군대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양심에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았다고 변명해왔다.
인생을 사는 데는 어쩔 수 없는 일로 큰 오해를 받게 될 때가 있다는 예를 발트하임 씨가 보여준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