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王宮面) 동룡리 308번지. 나는 이 곳에서 여름이 한창 막바지 기승을 부릴 때인 1929년 8월 26일, 세상에 처음 얼굴을 내밀었다. 그 해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고 한다.
내가 태어난 1929년은 왕궁면에 큰 경사가 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오랜 숙원이던 수리조합(水利組合) 저수지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전국적으로 전북 완주군 대아리(大雅里)에 소재하는 전북수리조합 대아리 저수지, 정읍(井邑)에 소재하는 동진수리조합 저수지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삼례에서 여산으로 가는 지금의 호남고속도로 길목에 ‘수경리’라고 있었다. 말 그대로 수경지(水經地)이고 옛 이름은 ‘능기울’이다. 그런데 이곳에 1905년 <왕궁수리조합>이 들어 선 것이다. 능기울은 예로부터 한양을 가거나, 내려올 때 하룻밤 묵어가는 곳으로 유명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서울과 목포를 잇는 <경목선>이었다. 이 능기울이 수몰되면서 우회해서 돌아가는 신작로가 만들어졌는데, 이 길이 삼례에서 여산 가는 국도 21번인 것이다.
이처럼 큰 저수지가 있어야 할 만큼 전후좌우 탁 트인 평야를 끼고 있는 왕궁면은 익산시 중심지로부터 약 14k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지세가 훤하게 트인 만큼 향리(鄕里)에 사는 사람들은 편협하지 않았으며, 의리를 중히 여겼고, 소박했다. 그리고 기름진 땅의 풍부한 소출 덕으로 인심들이 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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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고향 왕궁면 몽룡리 일원에 위치하고 있는 왕궁 저수지 / 1928년 축조하여 1931년 완공했고, 총 저수량은 195만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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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면은 역사적으로도 유서가 깊은 곳인데, 옆 동네인 금마면(金馬面)과 함께 삼한시대 마한(馬韓)의 수도라 일컬어지고 있으며, 일부 학자들은 백제(百濟) 시대 말엽, 즉 무왕 때에 수도를 부여(夫餘)로부터 이곳 왕궁면으로 천도하지 않았나 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나 역시 그 생각에 궤를 같이한다.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황산벌(黃山伐)에서 크게 패했다고 하는데, 황산벌이 바로 오늘날 익산군 황등면(黃登面)이었고, 의자왕이 망국의 한을 품고 죽어 역사가 중단된 곳이 이곳 왕궁면(王宮面)이 아닌가 추측된다. 역사서에는 의자왕이 신라군에게 밀려 백마강(白馬江)에서 삼천궁녀와 더불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오늘날 몇몇 연구가에 의하면, 그 지대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빠져 죽을 만한 곳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원광대학(圓光大學) 고고학 팀이 왕궁면에서 궁터 발굴을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그 규모가 너무 방대해서 도저히 민간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겠다 하여 일시 중단하고 국가차원의 발굴조사로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모양이다. 경주 유적 발굴 때에도 궁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 백제만이 가질 수 있었던 거대하고도 화려한 궁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왕궁리 유적은 미륵사와 더불어서 익산이 무왕의 매우 중요한 정치적 공간이었다는 것은 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나아가 발견된 성벽과 석축, 건물지, 생활관련 시설 및 대형화장실 등으로 볼 때 무왕시대에 백제의 수도가 사비에서 익산으로 옮겨졌다는 이른바 ‘익산천도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백제 멸망 당시 백제 유민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땅에 새로운 문화를 전해 주었다는 역사도 새롭게 거론되고 있는데, 지세로 보아 백제의 왕족들이 왕궁리(王宮里)의 지류와 연결되어 있는 익산군 춘포면(春浦面)에 위치한 만경강(萬頃江)에서 뱃길로 일본으로 향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오늘날까지도 왕궁면에는 수도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다. 왕궁리(王宮里)를 비롯해서 왕궁면(王宮面) 곳곳에는 ‘창뜰(倉坪)’ ‘궁뜰(宮坪)’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상당한 거리를 두고 존재하고 있고, 그 근방에는 또 ‘도순리(都巡里)’ ‘동고도리(東古都里)’ ‘서고도리(西古都里)’ 등의 부락들이 있다. 이들 부락들을 기준으로 보면 왕궁이 얼마나 방대한 규모였는지 알 만하다. 당시 신라는 정복자의 나라에서도 향유하지 못하는 엄청난 규모의 왕궁과 찬란한 문화를 접하였으므로 이것을 시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처럼 유서 깊고 풍요한 지세와 후한 향리의 인심을 가진 곳에서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 덕으로 유년기 초기까지는 큰 어려움이 없이 성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