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짧지 않은 생을 살아오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내 인생의 길목에서 자양분 역할을 해주었으며, 오늘날 내 삶에 있어서 뗄 수 없는 소중한 부분들이 되어 있다. 이제 그들의 모습을 하나둘 떠올려 본다.
내 추억의 가장 밑바닥을 들추어보면 이리공업학교 시절이 있다. 이때의 친구들 중에는 지금도 우정을 나누는 6명의 친구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우리 회사 MBS의 주주이기도 했다. 학창시절의 우정이 이제는 사회에 나와서, 또 회사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우선 정영순(鄭英淳)이라는 친구는 그 이름만 들으면 여자를 연상케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뚜렷한 남성의 길을 걸었다. 키가 작아 우리들은 가끔 ‘발발이’라고 농을 걸곤 하지만, 그의 성격은 정말 부지런하고 치밀하며 꼼꼼하다. 현재 동창회 총무를 맡고 있는데, 모임이 있을 때 그가 보내온 안내장을 보면 누가 보아도 감탄한다. A4 용지 한 장에 가득 채운 모임 안내장의 내용은 웬만한 소설가 뺨치게 알차게 꾸며져 있다. 장소를 안내하는 약도는 모임 장소가 있는 동네의 훌륭한 지도가 된다. 어떻게나 자세하게 그려 놓았는지 눈을 감아도 훤할 지경이다. 그는 해양대학 동기이기도 한데,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가 군에 들어가게 된 동기도 그의 성격 그대로였다. 3학년 때 6·25가 발발하자 그는 전쟁중에도 엉뚱하게 영어를 배운다고 미군들을 따라다니다가 현지에서 입대하게 되었다. 그는 중위 때 춘천에서 결혼하였는데, 해양대학 동기생인 송강섭(宋江燮)과 함께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대위 때인 1956년에는 낙하산부대 창설 멤버로 미국에 가서 훈련을 받고 왔다. 소령 때 5·16을 겪었고, 들으면 누구든지 다 알 수 있는 5·16의 쟁쟁한 주역들과도 한때는 호형호제하며 지낸 경력의 소유자다. 5·16 때 덕수궁에 진주하였고 시청 앞에 배치된 두 대의 탱크를 지휘했던 장본인이었지만, 혁명 성공 후에는 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군은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며 부대 복귀를 한 진짜 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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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리공업 시절 실습장 앞에서 / 하복차림인데 계절이 어중간한 탓인지 동복차림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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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곤(白致坤)이라는 친구는 이리공업 4학년 때 전주고로 전학한 학구파로, 서울상대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 그는 한국은행에 입행하여 금융인으로서 순탄한 길을 걸었다. 한국은행 총재 비서실장까지 역임했고, 금융연수원 부원장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서한용(徐翰龍)이라는 친구는 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만주에서 해방 직전에 내려온 친구로, 3학년 때 이리공업으로 전학을 왔다. 거친 땅 만주에서 생활했음에도 성격은 대단히 여성스러웠다. 대한투자신탁 부사장을 지냈다
최영기(崔英基)는 서울공대 기계과 출신으로, 이리공업을 졸업한 후에 서울공대로 진학해 공학도로서 가장 전통적인 길을 밟은 친구다. 전매청 기계과장 등을 거쳤으나 어떻게 된 연유인지 중도에서 하차했다. 그의 탁월한 실력과 경륜을 다 피워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친구다. 그러나 현재는 담배 원료 가공기계를 만드는 회사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양희기(梁熙圻)는 이리공업을 졸업한 후에 공주사대 수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학교 시절에 유명한 학구파였는데, 그의 자질은 학계에서 꽃을 피웠다. 공주사대 졸업 후 전주교육대학과 명지대학에서 수학 교수로 교단을 지키다가 정년 퇴임했다.
이치백(李治白)은 전북 김제 출신으로, 나와는 과(科)가 다른 전기과 출신이다. 그는 전공과는 전혀 다른 분야인 언론계에서 모든 열정을 쏟았다. 《전북일보》의 평기자로 시작하여 정치·경제·사회부장을 거쳐 편집국장·주필(主筆)을 지낸 후, 경영층으로 들어가서 부사장·사장·회장까지 역임한, 정말 그 분야에서는 최고의 복(福)을 받은 친구다. 현재는 일선에서 물러나 전주(全州)에 거주하고 있다.
비슷한 경우로 한상운(韓相云)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나와는 기계과 동기생이다. 그는 도중에 광주에 소재하는 조선대학으로 진학하여 경제학을 이수한 후, 1948년에 광주신보사에 입사했고, 이후 목포일보, 전남일보, 전남매일의 기자를 지내다 1980년에 전남일보 부사장에서 강제 해직당하는 비운도 겪었다. 그러나 다시 복직되어 무등일보(無等日報) 상임고문을 지내다 퇴임했다.
그는 예능에도 대단한 솜씨를 보였는데, 기타를 잘 쳤고, 또 브라스 밴드에서 트럼펫 주자로 출중한 실력을 보이곤 했다. 나와는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때부터 연락을 하기 시작했는데, 광주은행장 시절에는 거의 매주 만나다시피 했다. 그의 회갑연에도 참석했었는데, 내가 남의 회갑연에 참석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내가 겪은 광주항쟁’이라는 저서도 출간했는데, 1998년에 위암 수술을 받고 현재는 요양 중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