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11월 25일은 나에게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 날이다. 첫딸 민정(旻貞)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 날은 날씨가 무척 추웠었다고 기억된다. 민정이는 동대문 위생병원에서 미국인 닥터 루씨의 집도로,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제왕절개 수술에 의해 태어났다. 민정이는 태어날 때부터 나의 마음을 단번에 휘어잡을 정도로 예뻤다. 간호원에게 안겨 있는 민정이를 처음 본 순간, 저 예쁘고 어린 것이 조금이라도 추워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나는 민정이와 아내를 병원에 남겨 두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우리 집은 장충동1가 태극당 맞은편에 있는 12평짜리 구 한옥으로, 어설프고 외풍이 센 집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생광목(生廣木)을 필(匹)로 사 가지고 와서 밤새도록 커튼을 만들어 방 전체를 싸 버렸다. 마땅히 다른 보온장비를 구입할 수 없었던 가난한 아비로서 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었다. 그 이듬해에 집을 정리하고 청파동에 있는 처갓집 바깥채로 이사를 했는데, 옛날이 생각나서 알아보니 그 집은 지금도 그대로 있다고 한다.
정말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당장 입원비부터 걱정해야 했으니까. 별 수 없이 결혼 때 가져온 얼마 되지 않은 패물과 은수저 등을 처분해야 했는데, 이때 금은방 주인으로부터 장물아비로 의심을 받았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실소를 금치 못한다. 지금이야 웃을 수 있지만, 그때 그 참담한 심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민정이는 어린 시절을 부산에서 보냈는데, 세 살 때쯤인가 막 걸음마를 시작할 때 연탄풍로에 엎어져 화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성형수술이 안 되고 해서 성장하는 것을 봐 가며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유가 없어 결국 수술을 해주지 못한 채 시집을 보냈다. 지금도 아비로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민정이와 민석(旼錫)은 내가 충무출장소장으로 한창 밀수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저희 엄마와 함께 부산에서 거의 숨어 살다시피 했다. 밀수꾼들로부터 “당신 가족을 찾아서 몰살하겠다”는 협박 전화와 편지를 수도 없이 받았던 나로서는 가족의 안전문제가 가장 나를 압박하는 문제였다. 아이들에게 호강은 시켜주지 못할망정 숨어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밀수소탕작전을 조기에 끝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다. 그것이 당시 아빠로서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민정이는 예쁘게 성장했다. 서울의 남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추첨 1회생이 된 민정은 금호여중을 마친 후에 서울예술고등학교 미술과와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민정이의 성격은 나를 많이 닮은 것 같으나, 예술 쪽을 택한 걸 보면 엄마의 섬세함을 이어받은 것 같다. 꼼꼼하나 대범한 면도 보인다. 이 아이에게는 선천적으로 재물 복이 있는 것 같다. 큰돈을 벌었다거나 만진다는 것이 아니라, 나이에 비해 어렵지 않게 생활을 해 간다는 말이다. 조그마한 아파트를 솜씨껏 불려 나간다거나 하는 것을 보면 아비로서 대견함을 금치 못한다.
민정이의 결혼은 사돈 되시는 (주)D.I 박기억(朴基億) 회장과 나와의 오래된 인연을 통해 드라마틱하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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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첫딸 민정이가 박원덕과 백년가약을 맺던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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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억 님은 1956년에 종로2가 화신백화점 옆에 동일교역(東日交易)이라는 과학기기 소매상을 차리고 과학기기를 수입하여 직접 판매하고 있었다. 내가 그분을 만나게 된 것은, 감정분석소의 장비도입 건과 관련해서 감정장비 가격 조사차 화신백화점 옆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때 그 회사의 진열대에는 아주 희귀한 ‘엘네망(Elneman)’이라는 독일제 영사기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가격을 물으러 들어갔던 것이 시초였다. 박기억 님은 평양의대(平壤醫大) 재학 중에 전쟁을 맞이했고, 1·4후퇴 때 단신 월남하여 자수성가하신 분이다.
서로 같은 전쟁의 피해자라는 것과, 당시 그가 하는 일이 나의 업무와 많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던 게 인연이 되어 아주 절친한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
박기억 님과 내가 사돈이 되는 계기에는 동경의 박한홍 씨와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박기억 님이 일본 시마즈제작소(鳥津製作所)의 한국대리점을 하고 있을 때, 불행하게도 부도가 났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시마즈제작소의 창구를 맡고 있었던 일본의 종합상사 측에서는 박기억 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당신은 박씨인데, 한국의 박춘금 씨나 동경의 박한홍 씨의 보증서를 받아오면 계속 대리점으로 거래를 하겠다."
그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박한홍 씨는 동경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 있던 재일교포로, 당시 보유 부동산이 상당했다고 한다. 물론 박기억 님과 박한홍 씨는 서로 생면부지의 사람들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던 박기억 씨는 일본으로 가서 박한홍 씨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박한홍 씨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이로써 그는 재기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두 분은 형제 이상의 관계를 가지고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