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불시에 닥친 어머니의 임종 때문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는 아내를 잃었다.
아버지는 곧 새어머니를 맞이했고,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뜻에 의해 사촌형이 있는 삼례로 전학을 갔다. 그리고 이리와 군산에서 학업을 마쳤으니, 아버지와의 해후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만큼 나는 아버지가 가장 필요했던 시기에 아버지를 더 잘 알고 더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셈이다.
우리에게 정을 전혀 주지 않으셨던 새어머니는 6·25 당시에 아버지가 변을 당하자 주저 없이 집을 떠나 친정인 군산으로 가 버렸다. 자신의 피붙이도 하나 없고 남편도 없는 집에서 전처의 자식들을 책임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많은 세월이 지나 '여자로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 모든 것이 용서되지만, '그렇게 매정하신 분이었을까' 하는 생각은 버릴 수가 없다.
잔잔한 정을 느끼지 못하고 컸던 나의 성장 배경이,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주 들어 왔던 "잔정이 없다"라는 이야기에 대한 답변이 되었을지 모른다.
아버지를 회고하노라면 나에게는 맺힌 한(恨)이 있다. 그렇게 작고하신 아버지의 추모비를 나는 1990년 4월 8일에야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작고하신 지 꼭 40년의 세월이 흐른 때다. 40여 년이 지날 때까지 아버지의 추모비를 세우지 않았던 것은, 자손으로서 내가 무관심했다거나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평생을 청년운동가며 정당활동가로 보내셨던 아버님은 자신의 신념과 절개를 버리지 않으셨고, 나라가 흔들릴 때마다 혼신의 힘으로 자신을 던져 막으셨다. 그러시다가 죽음을 맞이하셨던 아버지였기에 나는 내가 비(碑)를 세우기보다는 사회단체나 국가에서 세워 주는 것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더 의의가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추모비를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란 망각하는 데 익숙한 것인지, 40년을 기다렸으나 날이 갈수록 아버지의 죽음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가고 잊혀져 갔다.
마침 내가 국민은행장으로 있던 시절, 대천지점을 방문하고 군산으로 가던 중 남포에 이르렀을 때였다. 길에서 보니 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 보니, 큰 오석(烏石)을 캐냈는데 한눈에 보아도 굉장히 큰 진품이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상당한 비용을 주고 그 자리에서 샀다. 이 때가 1983년이었는데, 7년을 더 기다렸다가 1990년에야 추모비를 세우게 되었다. 아버지의 비문에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의 행적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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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년만에 이룬 아버님 추모비 / 6.25전쟁 당시 지방 폭도들에게 참변을 당한지 40년만인 1990년 아버님 추모비를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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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009년 7월 호남고속도로의 순천기점으로 해서 184.7㎞ 구간(익산군 왕궁면 동룡리)가 건설되며 선친의 묘역 ⅓을 점유하게 되어 묘를 이장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맞았다. 국가의 시책이고 공사(公事)이니 만치 나는 적극 협조하여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슴에 안고 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장을 함으로써 묘비만 남게 되었는데 제작비용도 비용이려니와 비문에 표시한 바와 같이 한 애국열사의 행장이 기록된 것인데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7월 12일 익산 화장터에서 화장을 해서 나는 양친을 천주교 흑석동 교회에 모셨다. 그러니까 납골당이다. 보통 납골당은 지하에 있는데, 흑석동 교회의 납골당은 지상 1층에 있어서 공기 순환이 잘 되고 쾌적하다. 익산에서 이장을 하게 된 것은 아쉬움이 크지만 다행히 좋은 곳으로 모셨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을 천주교회 납골당에 모신 것은 우리 부부가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이다. 아내가 화상사고를 당해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세례를 받았고 그 후 아내의 뒤를 이어 나도 세례를 받았다. 나의 세례명은 ‘오거스티노’이고 아내의 세례명은 ‘테레사’이다.
어쨌든 양친을 교회 납골당에 모셨지만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선친의 행장을 기록한 추모비는 선산에 고이 모셔 후손 대대로 기려질 것이라 믿는다. 지금도 나는 선친을 회고할 때면 떠오르는 한마디 말이 있다. ‘족탈불급(足脫不及)' 즉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그 어른 같이는 못 살겠다는 생각, 바로 그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