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일행은 아버지를 포함해 5~6명이었다. "사람은 여섯인데 왜 15인분이 필요하냐"고 주인이 묻자, 아버지께서는 "조금 있으면 열 사람이 더 오니까 그렇소"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15인분의 밥상이 차려졌고, 아버지께서는 밥상 앞에 앉으면서 “아마 사정이 있어 못 오는 모양인데 이왕 차려 오셨으니까" 하시고는, 내어온 15인분의 식사 중에서 주인이 보는 앞에서 열 그릇을 다 비우셨다. 그 광경을 본 주인은 그만 기가 질려 버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한 만큼 대식가였던 것이다. 한번은 아버지가 닭을 잡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닭 주둥이부터 꼬리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다 드시는 것이었다. 물론 뼈까지 전부 드셨는데, 지금도 나에게는 불가사의한 일로 기억된다.
그런 만큼 힘도 남다르셨다. 씨름판에서는 항상 우승을 하셨는데, 오위장을 지내신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무골 집안의 혈통을 그대로 내려 받으신 것 같았다.
아버지의 힘에 대해 전설 같은 일화가 하나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께서는 교통사고를 당하신 적이 있으셨는데, 그때 아버지를 친 트럭이 3톤 가량 되었다고 한다.
큰 사고는 아니었는데, 사고를 당하신 후에 아버지는 "감히 나를 친 자동차가 얼마나 무거운지 보겠다"고 하시곤 사고를 낸 차 밑으로 들어가서는 그 차를 번쩍 들어 올렸다 한다. 그때 보이신 아버지의 여유와 어린이 같은 순수하고 해학 짙은 행동이 나는 지금도 부럽기만 하다.
아버지는 밖에서는 항상 탁월한 카리스마로 많은 사람들을 거느렸고 또 그들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셨지만, 집안에서는 항상 엄격하셨고 말이 별로 없으셨다.
그리고 기억나는 것은 조부님에 대한 아버지의 극진한 효심이었다. 조부님의 생신에는 인근의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벌이곤 했는데, 아버지는 이런 기회를 통해 정치와 독립운동에 신경 쓰시느라 평소 소홀히 했던 가정을 돌아보시곤 하셨던 것 같다.
그러한 아버지인 만큼 아버지에 대해 아기자기한 기억은 별로 없다. 이것은 물론 아버지에 대해 섭섭함을 느꼈다거나 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마치 무슨 운명처럼 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내 유년 시절에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시면서 중국을 두 번 왕래하셨고, 국내에 계실 때는 항상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랑방에는 항상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결국 아버님은 인천감옥에 수감되어 계시다가 해방 직전에 출감했으니, 유년 시절에 아버지와 함께했던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런 아버지셨지만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애틋한 정은 여느 부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왜정 치하임에도 나를 위해 교육보험에 가입하셨고, 나의 학비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당신이 집안을 돌보지 못하니 제도를 통해서나마 자식을 돌보았던 것이다.
일찍 친모를 잃고 메마른 환경에서 커야 했던 나의 장래에 대한 아버지의 걱정과 깊은 사랑에 나는 요즘 들어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중학교 입학 때부터 나는 15원의 보험금을 받았는데, 당시 쌀 한 말에 1원 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70~80만 원 정도 되는 큰돈이었다. 이 보험금으로 수업료는 물론 용돈까지 조달했다. 그러다 보니 부자지간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용돈 좀 주세요." 하는 대화조차도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없었다.
우리가 성장할 당시의 아버지와 지금의 아버지들과는 살아가는 환경부터가 전혀 다르다.
우리들의 아버지만큼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 낸 세대가 또 있겠는가. 일제하의 좌절, 해방 후의 혼돈, 6·25 전쟁의 참혹함 등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큰 사건들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만큼, 따뜻한 가족간의 교류가 존재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나는 요즘 들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격의 없는 대화나 행동들을 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한편으로 부러움과 우려를 동시에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