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6세 때, 나하고 열네 살 차이가 났던 형님은 충남 공주에 있는 영명실수학교(永明實修學校)를 다니고 있었다. 이 학교는 미국인이 설립한 2년제 학교로, 입학 대상은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졸업생들이었다. 이곳은 목공·낙농·농업·임업 등 곧바로 실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교육을 하는 특수학교였다.
한번은 할아버지께서 손자가 다니는 학교가 어떤지 구경하러 가신 적이 있으셨는데, 구경을 다 마치신 할아버지께서는 손자에게 ‘지금 집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의 전보를 치게 했다. 당시의 전보는 모르스 부호를 사용하는 체계였는데 전문발송 중 착오가 생겼다. 즉 ‘출발한다’는 표현이, 초상난 것을 이웃에 알리는 ‘발상(發喪)’으로 잘못 전달된 것이다.
때 아닌 부고를 접한 우리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당시 73세로 연로하셨던 노친께서 객사를 당하셨다고 집안이 온통 난리가 난 것이다. 조부님께서 공주에서 왕궁까지 오시는 동안 집안에서는 상(喪)을 치를 준비가 거의 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조부님이 나타나셨으니, 사람들은 또 한 번 놀라고 민망해했다. 도착한 할아버지는 대충 사연을 듣고, “어허, 경망스럽긴. 내가 벌써 북망산 갈 때냐?" 일갈하시곤 두 말 않으셨다 한다. 그리고 조부님은 그로부터 딱 10년 후, 83세의 수를 누리시고 돌아가셨다.
영명실수학교의 교장선생님이셨던 황인식(黃寅植) 선생님은 이 사건으로 우리 집을 기억하게 되었는데, 내가 해양대학에 입학했을 때 공교롭게도 해양대학 학장으로 재직하고 계셨다. 이 특별한 인연에 아버지께서 내 어깨를 두드리며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1885년 2월 25일 익산군 왕궁면 동룡리 엄곡(嚴谷)마을에서 오남매 중 삼남으로 태어나셨고, 1911년에 익산군 익창학교(益彰學敎)를 졸업하신 후에 한문사숙(漢文私塾)에서 한학을 수학하셨다.
아버지는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익산군 학교비(學校費 ; 학교의 예산 심의위원) 및 농회(農會) 평의원(評議員), 왕궁학교(王宮學敎) 후원회장 겸 왕궁면 협의회 의원, 왕북학교(王北學校) 창립위원장 등을 역임하셨다. 1938년에는 중국의 북경(北京)·상해(上海)·청도(靑島)·소주(蘇州)·항주(抗州) 등지를 여행하기도 하셨다.
일제 해방으로부터 6·25 전쟁이 일어나기까지는 왕궁면 건국준비위원장, 독립촉성국민회의(獨立促成國民會議) 익산군 지부장, 민주입법의원(民主立法議院) 의원, 비상시국대책위원회(非常時局對策委員會) 전라북도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시면서 건국 전후의 향토 발전에 크게 기여하셨다.
외조부님은 지금의 금마초등학교인 익창학교의 교장선생님을 지내셨는데,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기억은 거의 없다. 아버님은 바로 이 익창학교의 1회 졸업생으로, 외조부님의 제자이셨다.
당시 일제는 단발령으로 머리를 자르게 하고, 또 신교육 시행령을 시작으로 젊은 사람들에게 신식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래서 학생들을 모집했는데, 일제에 대한 거부와 변화에 대한 막연한 불안 등으로 학생들의 모집이 쉽지 않았다. 심지어 도망 다니고 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때 학교 선생님들은 사아벨 칼을 차고 다녔는데, 그 권위가 하늘을 찔렀다.
당시 아버님은 학생 모집을 담당하셨다. 원래 활동적이고 적극적이셔서 남을 이끄는 데는 탁월한 능력이 있으셨고, 또 기골이 장대하고 준수하셔서 이 역할에 적임이셨다.
한 번은 아버님이 학생을 모집하러 어느 집에 들렀는데 마침 식사시간이었다. 그 부모들은 “우리 아이는 지금 집에도 없고, 학교에 보낼 수도 없으니 그냥 돌아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물론 아버지는 그냥 물러날 분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일행들과 함께 그 집에서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진을 치고 앉아 기다렸다. 주인은 그래도 안 되었던지 식사를 대접하고자 했는데, 아버지께서는 “15인분을 내어 주오”라고 주문을 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