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모님에 대한 기억의 대부분은 아버지에 대한 것뿐이다. 11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해서는 인자함· 따뜻함이라는 아련한 느낌만이 내 뇌리에 남아 있을 뿐이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는 따뜻함은 별로 없다. 그러나 가슴 뭉클한 뭔가가 있다. 나는 요즘 와서야 아버지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자주 가지곤 한다. 내 인생에서 아버지 우석(愚石) 송우식(宋祐植) 님은 어떤 의미였을까? 아버지에 대한 나의 회고는 먼저 아버지의 엄격함과 그 생(生)의 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분은 아주 엄격했고,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으셨는데, 그러한 아버지의 성격은 아마 집안 내력인 것 같다.
조선시대 광해군(光海君) 때였다. 경상 감사직을 마치고 한양으로 가기 위해 상주 나루터에 선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耉) 대감은 부채를 펴서 천천히 흔들며 감회에 젖어 있었다. 옆에 있던 이방이 그 모습을 보고 이야기를 꺼낸다. “대감마님, 경상 감사 삼년 만에 얻은 것이라고는 부채 하나밖에 없군요." 그러자 송 대감은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이것도 내 물건이 아니니 사사로이 취할 수 없다." 하고는 나루터에 던졌다. 그 후로 이 나루터는 부채를 버린 장소라는 의미의 기선장(棄扇場)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이 같은 청백리 송영구 대감은 진천(鎭川) 송(宋)씨의 14세 손이며, 광해군 폐모(廢母) 때에 항절(抗節)하심으로써 예조판서(禮曹判書)에 특증(特贈)되었다.
전북 완주군 봉동면 제내리에는 우리 진천 송 씨 재실이 여러 채 있다. 종중이 다 다르지만 대개 한 개나 있을까 말까한데 우리는 여섯 채나 된다. 그런데 옛날부터 그곳에 는 적송이 많이 있었고, 진천 송 씨가(傢)사람이 죽으면 하나씩 베어가는 전통이 있었다. 그런데 그 적송은 어디서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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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 완주군 봉동에 있는 진천 송 씨 재실의 본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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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송 씨의 선산은 호남고속도로 익산 인터체인지 일대에 있다. 선산에는 아름답게 자란 오래된 육송들이 빽빽하게 서 있다. 약 400년 전에 심은 이 유서 깊은 나무들은 진송의 전통을 말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소나무들은 진송에 시집온 며느리가 처음 심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표옹, 송영구 대감의 며느리 가운데 남원의 삭녕 최 씨 집에서 시집온 며느리가 있었다. 남원의 삭녕 최 씨라면 훈민정음을 언해하고 <용비어천가>를 주해한 최항(崔恒)의 후손들이다. 송 씨 집으로 시집갈 때 친정아버지인 최상중이 딸에게 물었다. “시집 갈 때 무엇을 주면 좋겠느냐?” 그러자 그 딸이 변산 솔씨 서 말만 달라고 했다. 변산은 예로부터 궁궐을 지을 때 사용하는 질 좋은 소나무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인터체인지 부근의 보기 좋은 육송은 이 며느리가 시집 올 때 가지고 와서 뿌린 소나무 씨가 자란 것이다. 이 며느리가 진송 집안에 수립한 또 하나의 전통이 있다. ‘백자(百子)’편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형태의 떡이다. 사람 발뒤꿈치 모양의 흰떡 수십 개를 부챗살처럼 둥그렇게 모아 놓은 다음 그 위에다 계속해서 떡을 둥그렇게 얹는다. 마치 피라미드처럼 6, 7층을 겹쳐서 쌓는다. 행사가 끝나면 이 떡을 하나씩 먹으면서 자손의 창성을 기원한다고 한다. 백 명의 자손을 뜻하는 떡 이름처럼 송 씨 문중의 번창을 기원하는 떡이다. 지금도 문중 시제 때 만들어서 모두 같이 먹는다.
나의 조부모님이셨던 송순욱(宋淳郁) 님은 청백리인 표옹, 송영구 님의 10세 손으로, 구한말에 중추부사(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지금의 육군 대령으로 사단장 격이다)을 지내셨다.
나라를 잃고 고향인 왕궁면으로 낙향하셨는데, 성격이 굉장히 꼬장꼬장하셨고 옳지 않은 일은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다.
손자인 우리에게도 엄한 교육을 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우리는 분가해서 살았기 때문에 조부님에 대한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조부님이 사신 왕궁면 도순리(都巡里)는 내가 살던 동룡리(東龍里)로부터 약 2.5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어린 나로서는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조부님에 대해서는 지금도 기억나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