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인 27일 아침 외무부에서 정인용 씨는 전권대사 임명절차를 밟았고, 우리들이 대만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모든 관계관들이 분주하게 움직여 주었다. 공교롭게도 우리들이 비자를 만들어야 했던 27일은 토요일이었는데, 대만 대표부는 12시에 모든 업무가 종료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대표부에 오후 1시까지 대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겨우겨우 오후 1시 정각에 외무부에서 온 여권을 제시하고 비자를 받았다. 또한 대만 행 비행기 편도 여의치가 않아서 태국 항공사에 특별 교섭을 한 후에 대표단 3인의 항공권을 구입했다. 그리고 우리는 오후 5시에 종합청사의 부총리실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오후 5시쯤 부총리실에 도착하면서 나는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때 모여 있던 사람은 정인용·김원길·임창렬 씨였는데, 3인은 공교롭게도 경기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내가 도착할 때 그들은 복도에 소리가 들릴 정도로 큰소리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나는 ‘고교 동문끼리의 방담 정도겠지’라고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나를 보더니 일순간 조용해지지 않는가! 순간 나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 분위기에서 마치 나는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의 이런 육감은 들어맞았다. 내가 다가가자 그 중 가장 맏이였던 정인용 씨가 마치 시비하듯 말을 걸었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가면 돈을 즉시 준다고 합디까?”
“무슨 말이오? 교섭도 시작되지 않은 상태인데 저들의 요구 조건도 있지 않겠소. 수석대표로서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이오.”
나는 이렇게 응수했지만 무엇인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한술 더 떴다.
“1973년 오일쇼크 때도 말이지요. 그때 내 책상 위에는 해결해주겠다는 브로커들의 전문이 산같이 쌓여 있었지만 하나도 해결된 것은 없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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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구제금융 협상 당시 김대중 당선자 측의 경제 실세였던 김원길 씨의 경제정책에 대한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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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냉랭해지는 분위기에 나는 분통이 터졌다. 이 무슨 이야기란 말인가! 이런 국가적 대사에 1973년 때의 이야기가 왜 나오는가. 그리고 설사 그때 그 전문이 자기 책상 위에 산같이 쌓여 있었고, 그것이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하자. 그렇다면 그가 그 전문들의 내용에 일일이 대응을 해보기라도 하였다는 말인가.
나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참아야겠다는 생각과, 국가 간의 귀중한 약속인데 내 감정이 개입되어 틀어지면 그것은 서로 간에 불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데 “대통령 당선자께서도, 100억 달러도 좋지만 신중하게 추진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하고 김원길 씨가 거드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 틀렸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과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결국 그들로부터 내일 출발에 대해 가타부타 말도 듣지 못하고 정부종합청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 나는 김원길 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사태 수습을 부탁합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국가 간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신의도 중요한 일이었다. 할 수 없이 이번에도 나는 혼자의 몸으로 대만으로 가 유태영 박사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죄송한 마음이었다. 민간인 자격으로 혼자 갔지만, 유태영 박사의 이해와 대만 정부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때 이등휘 총통으로부터 직경이 약 25㎝되는 기념사발을 선물로 받아왔는데, 지금도 집에 잘 보관하고 있다.
그때 정부에서 발을 뺀 것은 중국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대만에서 우리가 100억 달러를 받게 됨으로써 중국과의 관계가 틀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한 것이다. 1992년, 대만과의 국교단절을 감수하면서 까지 맺은 <한·중(韓中)수교>에 금이 갈수 있다는 측면이 작용한 것이다.
중국과의 외교 문제가 대만의 자금을 도입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정부의 입장에서도 당연히 부담이 갈 수밖에 없는 문제였을 것이다.
물론 대만이 우리에게 자금을 제공하면서 내걸었던 조건, 즉 ‘양국 정부 간 협상을 통할 것’, ‘국제금융기구를 통해 지원이 제공될 것’, ‘일본을 지원 계획에 참여시킬 것’, ‘대만의 자금을 우선 상환할 것’ 등의 요구조건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우리가 왜 협상대표로 가는 것인가. 바로 이러한 난제를 풀고 협상을 통해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또한 이런 문제는 협상을 통해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어쨌든 아쉬웠던 기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