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유태영 박사와 나는 한때 국가의 문제가 끼어들어 뜻하지 않은 서운함과 오해를 빚기도 했다. 1997년 8월 대선(大選) 과정 중에 나는 모당의 C모 의원과 함께 대만을 방문할 기회를 가지게 되어 유태영 박사 소개로 이등휘 총통을 만났고, 두 달 뒤인 10월 달에 다시 한 번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10월 방문을 약속한 바로 전날, C모 의원으로부터 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비록 국가의 공식적인 의전행사는 아니지만 책임 있는 위치의 사람들끼리 한 약속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단 말인가! 대만 쪽에서는 이미 우리를 맞이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전갈이 왔다.
약속한 날에 나는 별 수 없이 혼자 대만으로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정말 참담했다. ‘죄송하고 송구하다’는 말은 이미 그들에게 통용될 단계가 아니었고, 30년 우정의 유태영 박사도 언짢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나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해 11월 19일에 우리나라는 IMF 체제라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 해 12월 5일에 유태영 박사가 한국의 경제상황과 대선 분위기를 돌아보기 위해 내한했다. 나는 그 다음날 모 당의 실력자 H의원과,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C의원 등과의 만남을 주선해 그나마 사과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오해도 풀 수 있었다. 10여 일 앞둔 대선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오가기도 했는데, 유태영 박사는 상당히 깊숙한 정보를 알고 있었고, 대선 결과를 엇비슷하게 예측하기도 한 기억이 난다.
1997년에 새롭게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당선자는 당선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IMF 사태의 진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 시기에 나는 또 한 번 유태영 박사와 우리나라와의 불미스러운 관계 사이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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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당선의 기쁨도 누릴 틈 없이 IMF 극복을 위해 골몰해야 했던 김대중 당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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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초에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유태영 박사는 12월 11일에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우리나라에 대한 지원을 공식 발표했다. 그때 유태영 박사의 직책은 중국 국민당 중앙위원회 당영사업(堂營事業) 관리위원회 주임위원(위원장)이었다.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구경꾼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비록 국교는 없지만 대만과 한국의 그동안의 우의를 감안할 때, 또 우리들이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마땅히 돕고 싶다. 그래서 100억 달러를 긴급 지원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 대한 요구조건은 있었다.
그리고 대선 후인 12월 22일에 유태영 박사는 다시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우리 정부의 한국 지원에 대한 12월 11일자 기자회견 내용은 대한민국 대선 결과와 관계없이 유효하다”고 재천명했다.
다음날 대만의 유태영 박사로부터 나에게 긴급 전문이 왔는데, 집권당인 국민회의의 정책위의장 김원길(金元吉) 씨에 대한 신원확인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말인즉, 유태영 박사의 기자회견에 대한 우리 정부 측의 공식적인 첫 반응으로 김원길 의장의 유 박사 면담 신청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만으로부터 ‘100억 달러 지원에 관한 건은 귀국의 송병순 씨를 경유해서 교섭에 임하시오. 이 사람은 대만 정부의 공식 창구로 보아도 됩니다’라는 의견을 국민회의 측에 회신했다는 통지가 왔다.
12월 24일 성탄절 전날, 오후 늦게 김원길 씨로부터 만나자는 요청이 왔고, 다음날 오전 9시에 역삼동 르네상스 호텔에서 만났다. 그 날 김원길 씨와 만난 나는 그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나와 유태영 박사와의 관계를 간단히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대만의 진의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28일 현지로 떠나 29일 대만 총통을 만나는 스케줄을 잡고 헤어졌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에 나는 임창렬 부총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대뜸 “대만에는 제가 가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망설여졌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부총리가 가는 것보다는 지금 단계에서는 차관 급 정도가 좋겠습니다”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내 말에 그는 잠시 후에 다시 전화를 하겠다면서 전화를 끊더니 조금 기다리자 곧바로 전화가 왔는데 “차관보다는, 이런 일에 경험이 많은 정인용(鄭寅用) 씨를 특명전권 대사로 하여 함께 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는 것이었다.
정인용 씨는 재무부 시절에 나와 함께 국장으로 승진했던 분으로, 그때 그는 주영(駐英) 재무관으로 발령을 받은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부랴부랴 대만 쪽에 우리의 의견을 전하고 회신을 기다리는데, 대만의 회신이 늦어졌다. 나는 혹시 무슨 착오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하여 조바심이 났다.
대만으로부터의 회신은 다음날인 26일 오후 늦게서야 날아왔다. 다행히 회신 내용은 ‘좋다’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