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박 명예회장은 첫째 동생 박정구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고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 후로는 동생들의 경영을 뒤에서 받쳐줄 뿐 일절 간섭을 하지 않았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후 박 명예회장은 문화지원 사업에 열중했는데, 돈이 드는 일이니 동생들한테 얘기를 해야 했다. 그때마다 정구, 삼구 회장은 형님의 요청이라면 흔쾌히 밀어주었고 “회사가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문화사업을 하라고 돈을 지원해 주었다”며 흐뭇한 표정으로 나한테 자랑하는 박 명예회장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알려졌다시피 박 명예회장은 메세나 회장을 맡아 문화예술인들을 지원하는데 발 벗고 나섰다. 일본 NHK방송의 기술자를 불러와 방음장치를 설계할 정도로 정성을 쏟아 사옥 본관에 <금호아트홀>을 지어 운영하면서 문화사업에 정열을 쏟았다. 피아노의 손열음, 김선욱, 바이올린의 권혁주, 첼로의 이상은 등 음악영재를 발굴해 명품악기를 사주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금호4중주단>을 만들어 전 세계 순회공연을 지원해주었고, 유망한 미술인들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다보니 나도 자연히 박 회장이 관여하는 문화행사 등에 동참하게 되며 문화예술에 취미를 갖게 되었고, 당대의 저명한 문화예술인들과 만났다. 연극인 박정자(朴貞子), 손숙(孫淑), 윤석화(尹石花), 여류시인 김남조(金南祚), 서예가 김응현(金應顯) 씨와 친교를 나누며 베를린,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음악세계에 심취했다. 경제학계, 정치계, 관계에서 평생을 보낸 나에게 있어서 문화예술 세계는 인생의 색다른 경험이었고 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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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부터 박삼구 회장, 손열음, 박성용 명예회장, 나,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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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회장은 기업가로서도 훌륭했지만 문화예술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몽블랑 상 등 국제적인 상도 여럿 받았다. 이 대목에서 박 회장이 문화지원 사업을 성공적으로 펼칠 수 있었던 데는 금호문화재단의 정혜자(鄭惠子) 부사장의 숨은 조력이 있었다는 것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KBS 음악PD 출신인 정 부사장이 사업을 총괄하며 헌신했기 때문에 박 회장의 뜻도 결실을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박 회장의 활동으로 문화사업이 한국의 기업문화의 하나로 자리 잡자, 다른 기업에서도 하나 둘 문화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어느 날, “이 장관, 음악이나 문화사업은 이제 다른 데서도 하니까 나는 그만해도 되겠어요. 나는 이제 다른 걸 해야겠어요.” 그러면서 산을 하나 보러 가자는 것이었다.
“갑자기 산이라니요?”
“가보면 압니다.”
우리가 같이 간 곳은 인천의 비행장 바로 옆에 있는 무의도(無衣島)라는 섬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이렇다 할 식목원이 없어요. 이제 음악지원 사업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았으니, 사람들이 희귀한 수목을 볼 수 있는 식목원을 하나 만들어 볼까 합니다.”
박 회장은 식목원을 만들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왕립식물원> 등 세계의 유명한 식목원 답사를 이미 다녀온 터였다. 그 후 장소를 물색하다가 인천비행장 옆에 있는 무의도를 주목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섬의 상당부분에 식목원을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인천시하고 계약을 했는데, 사실 인천시는 탐탁찮게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박 회장한테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지금은 좋을지 모르지만 공항이 확장되고, 허브화 되면 그 인접 땅을 많이 필요로 하게 될 것이고, 식물원 같은 것은 흡수 수용하려고 할 공산이 큽니다. 애써 좋은 나무 심어 키워놨는데, 나중에 캐가라고 한다든가, 그렇게 될 수도 있으니 그곳은 식목원 같은 장기 계획으로는 마땅치 않은 것 같아요”라고 조언을 했다.
그렇게 하여 장소를 다시 물색하는 등 새로운 구상을 하던 중 박 회장이 유명을 달리했다.
박 회장은 2005년 5월 23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병원에서 운명했다. 그 이전인 2002년 첫째 동생인 박정구 회장도 폐암으로 타계했다. 사실 종양이 있다는 진단은 박성용 명예회장이 먼저 받았다. 그때 박 명예회장은 동생에게 “너도 한번 체크해보라”고 했고, 결국 정구 회장도 암 판정을 받았다.
그 후 박정구 회장의 병세가 급작스레 악화되어 별세하고 2, 3년인가 지나면서 박 명예회장의 병세도 악화되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갔다. <국립암센터>의 이진수(李振洙)박사한테 치료를 받았는데,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