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선교회가 문을 닫고 철수하기 때문에 팔려는 것이었는데, 바로 옆에 수상 관저 겸 사무실(Hôtel Matignon)이 있어서, 이 부동산을 매매할 때에는 프랑스 정부에게 선매권(先買權)이 있다는 법적 부대조건이 있었다.
프랑스 정부 측으로서는 이 집이 외국 공관으로 사용될 경우, 도청 등 보안상 중대 문제가 생기므로 수상실에서 선매권을 발동, 우리의 매매 교섭은 중단되었다.
또 다른 후보는 같은 제7구에 있는 건물(125, Rue de Grenelle)로, 이 건물은 프랑스 혁명 때 루이 16세의 의전장이었던 드 브레제 후작(Marquis de Brézé)의 집이었는데 소유주인 그의 후손이 팔려고 내놓은 것이었다. 근래에 사람이 살지 않고 빈 집으로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수리가 필요한 상태였다.
e자로 된 2층 건물에 앞마당과 함께 뒤에도 넓은 정원이 있어서 위치, 모양, 넓기 등, 기본 조건이 우리의 대사관 용도에 매우 적합하였다. 바로 옆에는 노동성이 있고 앞에는 스위스 대사관이 있으며, 수상 관저, 국방성, 교육성 등 정부 각 부처와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웨덴 등 많은 외국 대사관이 이 지역에 모여 있고, 또 파리의 명소 폐병원(廢病院 : Invalide : 나폴레옹의 묘가 있음)과 프랑스 외무성이 지근 거리에 있어서, 대사관 위치로 볼 때 서민이 양반으로 승격하는 셈이었다.
나는 정부에 건의하여 1,300만 프랑에 구입계약을 체결하였다. 집은 샀으나 수리를 해야 이사를 들어갈 수 있겠는데, 수리비 약 200만 프랑이 문제였다. 외무부에서는 연말에 30만 달러 가량 마련해 줄 수 있겠다고 하는데 수리비는 대략 50만 달러(달러 대 프랑 환율 1:4) 가량이 들 터이므로 20만 달러가 모자라는 셈이었다.
마침 남덕우(南德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파리를 방문하게 되어 나는 그 기회에 남부총리를 새로 산 집으로 안내해 보여주고는 수리비 20만 달러를 내년 예산에 마련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남 부총리가 선선히 “그리 해 봅시다.”라고 응낙하여 수리비 문제는 해결되었다.
프랑스의 전략사상가이자 역사철학가인 레이몽 아롱(Raymond Aron)과의 사귐은 나에게 있어서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그는 유명한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 출신의 수재 석학(碩學)으로서 역사, 정치, 경제, 군사전략, 사회과학 전반에 걸친 박식한 지식과 함께 건전한 역사관과 현실 인식 및 가치 판단 능력을 갖춘 현대의 일류 지성인이었다.
그와 가끔 만나 식사를 함께 하면서 공산주의 문제와 한반도의 안보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곤 하였는데, 인식과 판단에 있어서 서로 일치하는 점이 많고 또 배울 점이 많아 그와의 만남은 큰 기쁨이었다.
그는, 남북한의 휴전선에 의한 분할과 북한의 공산통일정책 및 군사력의 공격적 전선 배치, 남한의 수도 서울이 휴전선으로부터 장거리포, 유도탄 당의 사정거리 내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 등의 제반 요건을 감안할 때, 남한으로서는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경인지방을 마비, 초토화시키는 전격작전과 이에 이은 휴전 제의의 평화 공세가 가장 경계하여야 할 일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에게 한국에 가서 한번 실제 사정을 시찰하라고 권유하여 그의 한국 방문을 성사시켰다.
또 한 사람의 군사 전략가로는 갈루아(Francis Gallois) 장군이 있었다. 그는 핵 전략에 관하여 조예가 깊은 공군 출신의 장군으로 드골 대통령도 그의 의견을 경청하였다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한국의 가장 큰 군사적 취약점은 방대한 인구가 집중되어 있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활동의 중추인 경인 지구가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파괴되기 쉬운 지근거리에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를 해소하는 대응책으로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하나는 수도를 남쪽 중부 지방으로 옮기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원자 폭탄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가 다 약 10억 달러만 들이면 가능한데 이는 한국이 신중히 검토하여 결정할 일이라는 것이다.
언론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르 몽드(Le Monde) 지의 사장 앙드레 퐁뗀느(André Fontaine)와도 사귀어 가까이 지냈다. 북한의 초청으로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보고 매우 인상이 깊었는지 평양 방문에서 돌아와서는 북한에 대하여 상당히 호의적인 방문기를 썼다.
나는 그에게 한국에도 가서 공정하게 보라고 말하고 그의 방한을 주선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돌아온 후 나와 둘이 만난 사석에서는 비판적인 소리도 많이 하였으나 신문에 게재한 방문기에서는 비교적 객관적인 관찰을 소개하였다.
